얽힘의 리얼리티 / 조각의 표현                                                                                                                                                    이영욱 (미술평론가)

1.

돌은 다른 어떤 조각의 재료보다도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힘이 강하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전부를 작가의 의지에 내맡기는 일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에너지에 충만하고 공교로운 구상을 가진 작가라 할지라도, 돌을 표현매체로 선택하는 경우에는, 돌의 저항에 대면하여 그들이 지닌 특성과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르네상스 고전기나 매너리즘 시기의 숨 막힐 정도로 정확하고 화려하며 기교로 충만한 조각들이나 통일신라시대 석굴암의 엄숙한가 하면 우아하고 맵시있는 本尊佛등도 모두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들의 경우는 그때마다 재료가 되는 돌의 특성들이 작가의 적절한 구상 내지는 실행과 그야말로 창의적으로 또 긴밀하게 만나 서로를 상승시킬 수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원칙은, 돌을 재료로 사용한다는 전제 아래서, 추상 조각이나 미니멀적인 작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니 어찌 보면 더욱 엄격하게 적용된다. 추상 작업의 경우는 자신의 표현 언어를 재료의 속성에 더욱 밀착시키고 있으며, 또 미니멀적인 작업도 대상을 다름 아닌 그 대상이게 하는 속성 자체 (objecthood)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돌을 재료로 선택할 때는 그 재료로서의 돌과 관련하여 어느 경우보다도 작가 나름의 정확한 감각과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 자기가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또 구상하는 형태가 돌이라는 재료와 잘 맞아 떨어질 수 있는 것인지, 만일 그러하다면 그러한 구상이 돌이라는 재료와 어떤 각도에서 창의적으로 접합될 수 있을지 그리고 구체적인 표현에 있어 그 때마다 주어진 돌의 속성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돌조각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작업을 평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이기도 하다.

 

2.

이번 전시회에 출품되는 차현주의 작업들은 그녀의 이태리 유학기간(92년-96년)중에 제작된 것들이다. 작업들은 우선 표현하려는 바의 진솔함과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탐색 그리고 탐색에 따른 변화 양상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최근 적지 않은 미술학도들이 유학을 통해 더욱 폭 넓고 심도있는 자기훈련의 기회를 갖는 가운데, 대부분 스스로의 감성과 욕구에 기반한 뚜렷하고 구체적인 목표나 그에 따른 준비가 없음으로 해서 작가로서의 아이덴티티에 혼란을 초래하거나 스스로 깊이 확인한 것이 아닌 정형화된 작업에 머무르는 일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와 비교한다면 그녀의 수업은 성과있는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일단 개별 작업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작업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가족여행, 1993> 작품은 말 그대로 가족상이다. 하지만 이는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화목하고 조화로운 이상적 가족상은 아니다. 중앙의 남편은 경직된 태도로 아이와 부인을 싸안고 있다. 정면을 행해 열려 있는 그의 가슴은 당당하기 보다는 당당하려는 의지를 내비칠 뿐이다. 몸체와 얼굴 부분은 세부를 지니지 못한 채 적당히 지워져 있으며, 그림자를 통해 드러나는 눈자위 부분의 음영은 어딘가 그의 어둡고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는 듯하다. 부인 상 역시 구체적인 세부는 생략된 채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가지런히 모아진 손과 특히 과장하여 놀란 듯한 눈이 인상적이다. 부모들의 경직된 태도와는 달리 세부적으로 묘사 된 아이의 경우는 생명감이 넘친다. 정면을 향해 나아가려는 듯한 동적인 자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아이의 생동하는 호기심 을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작품은 전체로 소박하면서도 정확한 묘사에 의해 한 가족이 낯선 세계에 처해 각각 취하고 있는 상황과 태도, 정서(불안, 두려움, 결의, 호기심 등)를 드러내 보여주며, 일종의 보편적인 울림을 갖는 데까지 나아간다.

 

<왕, 1994> 의자에 앉아있는 권력자의 모습. 왕의 몸체는 그 권력의 상징인 의자와 합체되어 있다. 움직일 수 없이 묶어 있음, 옆으로 돌려진 얼굴의 실루엣은 욕망이 성취된 이후의 허망함과 고독감을 드러내는 듯하다. 우아하고 화려한 대리석의 질감과 더불어 표현된 가슴 부분의 갈비뼈, 그리고 다리 부분을 감싸고 있는 늘여뜨려진 옷, 의자와 합체된 좌대. 이들 사이의 대조와 연속은 돌이라는 재료의 무게에 힘입어 권력의 무거움과 욕망의 허망함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더욱 명료하게 한다.

 

<여인, 1995> 절망한 듯한 여인의 자세. 전체적으로 인체는 이전에 비해 추상화, 형식화되어 표현된다. 흔히 반추상의 여인상을 표현하는 데 많이 쓰이는 이 어법은 기존의 상투화된 양식을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채 도입한 것이 아닌지··· 무릎 아래 부분의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여인의 삶의 고단함과 신산함을 드러내는 다리와 발의 묘사에서 형식주의적 어법과 사실적 어법을 결합시키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어머니, 1994> 거의 전형적인 표현주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작품. 작가의 작업 노트에 쓰인 "상처받은 인간과 연약한 여인과 같은 우리의 모습에서 가슴 아픈 연민과 숙연한 아름다움을 느끼곤 한다"는 작가의 토로를 구현하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음. 하지만 특히 돌이라는 매체를 통해 분출과 변형, 왜곡, 과장과 같은 표현주의적인 어법이 어떻게 '숙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엿보이는 듯하다.

 

<외로운 사람들, 1995> 극도로 단순화되고 뭉게져서 흔적만이 남은 듯한 해체된 여인들의 모습. 이들 각각은 높으면서 좁거나, 낮으면서 넓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좌대 끝에 안치되어 있다. 흐물흐물한 인간과 정련된 좌대의 넓이와 높이의 간극에서 유래하는 대조. 서사적 상황을 도입하는 것을 통해 이 대조를 극대화하고 그로써 인간들이 겪는 지독한 고독감과 좌절을 나타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하지만 간결하면서도 형식적인 상황제시의 방식과 해체된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은 왠지 구체적인 울림을 갖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눌린 사람 연작, 1995> 가장 최근에 제작된 이 작품들은 앞서 이야기한 '상처받은 인간들의 절망과 좌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구현해 보겠다는 작가의 목표를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족시키는 듯하다. 벨기에 산 검은 돌의 거의 투명할 정 도로 짙은 몸체는 삶의 압력에 의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어지고 얽혀진 여인의 형태를 그야말로 '아름답게‘ 조각해 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구상적이며 표현적인 분출과 응축된 형식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획득하려는 그리고 그로써 상처 받은 자들의 절망과 좌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담아내려는 그녀의 의도는 진흙원형을 압축시키는 과정이 삶이 인간에게 부가하는 압박을 형상화하는 지점에서 특히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하다. 진흙 원형을 이용한 아이디어도 그렇고 검은 돌을 활용하여 사실적 표현이 드러낼 수 있는 돌출효과를 억제한 것 또한 작가 나름의 진지하고 적극적인 모색 과정이 결과한 성과하는 생각이다. 특히 <피에타>의 경우는 윤곽의 추상적 선과 돌의 색채 연인의 자세가 매우 긴밀하게 결합되어 구체적인 울림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3. 이제까지의 분석을 기초로 그녀의 그간의 작업 경과를 간단히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대체로 그녀의 유학 초기의 구상적이며 상징적인 어법을 상대적으로 형식적이며 추상적인 어법으로 발전시켜 갔다. 이러한 변화는, 주제 상의 변동과 병행한 것이다. 그녀의 작업 주제는 초기에는 일상으로부터 출발하어 존재 조건 일반에까지 확대되는 삶의 불안과 '두려움, 공허함 등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는 절망하고 좌절한 사람들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의 표현이라는 상대적으로 집약되고 단일화된 주제로 변화한다. 이후 그녀는 이러한 주제에 따라 구상적 이며 표현적인 분출과 응축된 형식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획득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며 그 결과 매우 극단적인 작업요소들을 통합해 내는 예외적인 작업 상의 성취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성취는 성취대로 인정하면서도 몇가지 의문점을 제기하고 싶다. 이는 지난 몇 년 간의 작업 경과를 전체적으로 일별하면서 작품에 대해 그녀와 비교적 상세한 대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경험에 따른 것이다. 의문점은 단적으로 구상적이며 표현적인 것을 추상적이며 형식적인 것과 결합하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녀에 있어 이 양자의 결합은 어딘가 직접적이며 기계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이 양자를 어떤 식으로든 이미 통합하고 있는 형태이다. 나로서는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이 양자의 대립을 미리 전제하고 거기에서 통합을 모색하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이는 원칙적으로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때문에 최근의 이 양자를 가장 성과있게 결합하고 있는 작품들에서도 내게는 여전히 문제점이 남아있다고 보인다. 즉, 최근의 <눌린사람> 연작의 경우에도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먼 거리에 서 볼 때 드러나는 광택효과나 덩어리감 혹은 형식적 완결성이 가까이서 감상할 때 드러나는 절망하는 여인상의 측면과는 어딘가 녹아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달리말해 '이렇게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이면 저렇게 보이는' 일종의 지각의 이중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또한 주제 해석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나로서는 그녀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일정정도 분리된 것으로도 일종의 조형적인 것에 비중을 두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가 상처받은 자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할 때 그 아름다움은 그 사대 자체에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얽혀져 존재할 수밖에 있다. 때문에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얽혀 있음의 리얼리티 혹은 그 얽힘의 결을 표출해낼 수 있는 어떤 형태이며 표현이다. 이것을 정확히 그리고 풍부히 감지할 수 없을 때 분리가 일어나며 원래의 복합적인 사태가 포용성 없는 단순화로 귀결된다.

 

사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지적은 결국 삶과 현실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이해와 그것을 표출할 수 있기 위한 끊임없는 훈련과 모색의 중요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 과정에서 미처 충분히 가능하지 못한 난점들에 수없이 부딪히곤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때마다 또다시 과감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전환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녀의 최근 작품들 보다는 유학 초기의 작업들에 더 호감을 갖고 있다. 앞서 언급된 <가족여행> 이나 <왕> 같은 작품들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작업들이 이후의 작업들보다 더욱 열려 있으며, 또한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정보량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부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나는 그녀가 형식적인 응축보다는 은유나 상징화에 더 능숙한 기량을 지닌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동시에 돌이라는 재료 역시 보다 표현적이며 서사적인 형식을 선호하는 그녀의 감각과는 배치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정당하다. 중요한 것은 그 정당함을 보다 풍부하게 막힘없이 자신 스스로로부터 길어내는 것이다.